어떤 사람이 장화를 신고 길을 걸어오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람이 되어 처음으로 본, 송장과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무서워 얼굴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
지하철을 타고 등하교를 한다. 아침 등굣길의 지하철에는 크게 두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수많은 바삐 갈 길을 가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을 뚫고 구걸하는 사람.
구걸하는 자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아마 나는 송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손에는 숙제로 내준 프린트물이 들려있거나, 엠피쓰리로 무서울 정도로 음악을 크게 틀고 허공을 쳐다본다. 구걸하는 자가 들어온다.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린다. 나의 얼굴에는 짜증이 번진다. 모르긴 몰라도 송장 같은 얼굴, 입속에선 악취가 풍겨져 나올 것이다.
한번은 친구들과 구걸하는 자를 돕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교길에 벌어졌던, 어느날 밤 하교길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의 시작을 열었다. 중년나이의 남성이 공손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 내가 있던 열차에서 다음 열차로 넘어갔다. 얼마 후 남성이 돌아왔다. 공손한 태도로 구걸하던 그 남성은, 다시 돌아오더니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향해 삿대질했고 사람들은 그를 피했다. 어떤 사람들은 킬킬거리며 그 남자를 비웃었다. 내 옆의 남자는 나쁜 거 보지 말라고 속삭이며 여자친구의 두눈을 가려주었다. 이상한 동물, 야수를 관찰하듯 휴대폰 동영상을 들이댔다.
나는 솔직히 말해, 남성의 공격적인 울부짖음 보다 사람들의 반응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구걸하는 자들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이야기를 듣자, 친구들은 남자를 공격했다. 대부분이 구걸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열심히 살지 않으려는 자에게 돈을 노동의 대가없이 건네준다는 사실을 옳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홀로 자립할 수 있는 의지는 더 사라진다고 했다.
알고 있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그 남자의 울부짖음을 보기 전까지 내가 했던 생각들이었다. 솔직히 친구들보다 더 심했다. 친구들은 장애인, 노인과 같은 사람들의 구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도와줘야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행복감을 가져다 주지 않는 구걸행동에 대해서, 구걸자의 상황과 무관하게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구걸자는 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의 평온을 깨트리니, 그들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들만 도와주는, 이기적인 기집애였다. 군고구마 파는 할머니의 주름과 웃음이 예쁘다고 생각할 때 군고구마를 사왔고, 지하철의 따스한 음악소리를 주는 맹인의 바구니에만 돈을 넣었다. 즉 나는 구걸하는 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구걸 방식을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행복감을 가져다 주지 않는 구걸행동에 대해서, 구걸자의 상황과 무관하게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구걸자는 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의 평온을 깨트리니, 그들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들만 도와주는, 이기적인 기집애였다. 군고구마 파는 할머니의 주름과 웃음이 예쁘다고 생각할 때 군고구마를 사왔고, 지하철의 따스한 음악소리를 주는 맹인의 바구니에만 돈을 넣었다. 즉 나는 구걸하는 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구걸 방식을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남자의 울부짖음은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했다. 못사는 사람을 도우려는 그 행동에도 경제적인, 시장원리, 혹은 내가 생각했듯 타인을 대하는 예의, 아름다운 구걸방식인가 아닌가 라는 판단에 따라 행동해야 할까? 그것은 자본주의와 지나친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에 지나치게 물들어버린 사고 때문이 아닐까?
노력없이 이득을 얻으려 하다니, 노동의 대가없이 사람에게 돈을 지불할 순 없다. 마치, 과도한 사회주의 비판하는 자들의 대사같다.(정확히 지식이 부족해 지나치게 비약이 심하다) 정치적 관념, 마치 복지를 반대하는 정치가들의 의견의 일면이 드러나 있는 대사다. 낮은 자를 도와주는 일을 꼭 그렇게 정치, 경제적 시야로 바라봐야 할까? 단순히, 안 좋은 자들에게 나의 몸을 낮추는 자비심, 동정, 그래, 감수성으로 바라보면 되는 일인데.
행복을 주는 구걸방식에만 동요하는 나도 문제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누군가를 돕는 일에 꼭 드러나야 되는가? 낮은 자를 바라보는 자비심과 감성이, 그 낮은 자의 아름다움을 판단하여 발휘되는 것이던가? 철없이 자란 공주마마의 예쁘지 않은 것들은 다 싫어, 같이 어리석은 생각이다.
(글이 점점 먼 곳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아메리카노를 들고 낙엽이 한 두장씩 떨어지는 학교 캠퍼스를 걷는 것(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 가격, 1700원을 구걸하는 자에게 건네준다고?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늦은 밤, 술자리, 세상을 한탄하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비운한 듯 보이는 것. 사랑에 빠졌다 애인과 헤어진 것을 인생이 끝난 듯 바라보는 그 순간, 같은 것의 우리들의 감수성은 파르륵 떨린다.
삶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야 할 땐, 애인에게 이별 통보받는 그 순간 뿐만이 아니다. 지하철의 수많은 거지들을 보고 단 한번도 불쌍하다는 감정 대신 더럽다, 짜증난다 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다.
앞의 언급한 그 남자의 울부짖음을 킥킥대며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었던 사람들의 삶이야 말로, 사랑과 자비심이 없는, 끝장난 인생이다. 불쌍한 사람에게 사랑주려는 마음 없는 자의 입김은 악취가 풍기고, 얼굴은 송장의 얼굴이다. 이와 같은 감성을 충족시키는 데 돈을 쓰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으면서, 나보다 낮은 자를순수하게 도와주려는 그 돈의 가치를 올바른 복지와 아름다움을 언급하며 비판할 자격이 나에게 과연 있던가?
마지막으로 톨스토이의 글을 부분 부분 옮겨 적는다.
좀 전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는 나의 곁으로 다가와 옷을 입혀주고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생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얼굴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좀 전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는 나의 곁으로 다가와 옷을 입혀주고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생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얼굴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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