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니풀 같은 것들
또 한 번 고개 숙여 보러 함인가
황토 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 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서정주, 풀리는 한강가에서
초등학교 때, 수인이라는 고니 같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그 또래 아이들보다 빨리 성장한 여자애였다. 그에 비해 난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아 아홉살 어린애들 사이에서도 작았다. 수인이는 엄마와 아빠, 오빠 모두 클래식음악을 하는 애였다. 학교 근처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나는 기회가 되어 그 친구와 함께 발표회에서 피아노 연탄 곡을 연주했고,
그 연습을 위해 종종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엄마는 수인이를 고니 같다, 라고 표현했다. 수인이가 예뻤거나 마르고 우아한 체형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집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발랄하게 수다 떠는 여자애들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남자애들은 수인이를 무서워했다. 나는 어린 맘에 남자애들은 저속해 진짜 보석을 못알아본다 생각했다.
수인이는 포니테일로 새까만 머리를 묶고 앞머리를 전부 내놓고 다녔다. 어린 내 생각에도 이마가 예뻤다. 수인이의 자세는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어린애답지 않은 그윽한 눈매로 상대방을 쳐다볼 때가 종종 있었다. 어른들에게 공손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지만 학교 친구들과 늘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분명해졌다. 또래 여자 친구들과 팔짱끼고 조곤조곤 수다를 떨며 학교 복도를 걸어 다녔던 나와 다르게 수인이는 혼자 다녔다. 도도함은 자신의 오만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단 조금 슬픈 기분에서 나온 것 처럼 보였다.
물론, 아직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던 수인이가 한, 혹은 서러움과 같은 감정을 알았던가는 알수 없다. 비롯된 도도함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것은 어쩜 쓸데없이 달콤한 상상에 빠지기 좋아했던 철없는 어린애인 내가 음악 하는 친구, 에 대한 동경, 그리고 엄마가 저 애는 고니같애, 라고 얘기했던 표현이 합쳐져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인이의 까무잡잡한, 이지적인 이마를 바라보던 어린 나의 환상은 아래 문장을 읽자마자 연상되었다.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장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기억난다. 중학교 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이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되는 동물, 혹은 닮고 싶은 동물을 적어 써내라고 하셨다. 익명으로 우리는 쪽지에, 나를 비추는 동물을 적어냈다. 그때 한창, 소설 <아름다운 비행>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기러기, 라고 적어냈다.
실은 난 기러기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늘 위로 브이자 형태로 날아가는 저것이 기러기인지 아닌지조차 잘 몰랐다.
하지만 기러기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서글픔, 한 같은 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안의 고독에서 퍼져나오는 슬픔을 닮으려고, 안 그래도 쳐진 눈썹을 자주 더 쳐지게 하며 에메하게 웃는 버릇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내숭 백단의 발랄하고 새침한 여자애였다.
시인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던 것들이 풀린다. 도도한 고독, 슬픔에 젖어 혼자 거리를 두고 멀리 살아가려 했더니, 얼어붙었던 강물을 풀리게 하는 것들이 있다. 나를 사랑했던 것들로부터 멀어져 고독을 슬퍼하는 기분에 심취해살아가는 것이 한평생 울고가려는 서리묻은 섣달의 기러기다. 그런데 그가 사랑했던, 그래서 그를 사랑했던 것들이 그를 기러기가 되어 날아가게 하지 않네. 때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야기 뭉텅이를 들고 시인을 찾아온다. 서러운 이야기, 기쁜 이야기, 가슴 설레는 이야기, 시인은 이야기를 듣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한평생 살아가야지 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햇빛속의 풍경을 본다. 황토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사랑하는 사람을 잊은 슬픔이 느껴지는 풍경들이다. 햇살을 통해 환하게 비춰지는 시인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 누군가를 추억하는 상황. 아..나는 이제야 알겠다.
나는 상상한다. 시인과 사람들은 공통된 누군가를 잃었다. 슬퍼서 시인은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한평생 서리묻은 기러기가 되어 울다 다른 곳으로 날아가 도피하려 한다. 꽁꽁 얼어붙게 하여 멀리 떨어지는 것이 덜 아플 듯 싶어서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연약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마지못해 사람들을 맞이한다. 시인을 찾아온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지만 시인의 방문을 열어, 시인의 차갑게 얼어붙은 얼음장을 깨고 햇살을 가져다 준다.
강물은 녹는다. 사람들과 함께 따스한 햇살 속에서 다시한번 사랑했던 사람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황토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기러기같이 내 한평생을 울다 가려 했더니, 시인은 나지막히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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