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3일 수요일

사람은 주는 사랑으로 삽니다.


  어떤 사람이 장화를 신고 길을 걸어오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람이 되어 처음으로 본, 송장과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무서워 얼굴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
   지하철을 타고 등하교를 한다. 아침 등굣길의 지하철에는 크게 두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수많은 바삐 갈 길을 가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을 뚫고 구걸하는 사람.

  구걸하는 자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아마 나는 송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손에는 숙제로 내준 프린트물이 들려있거나, 엠피쓰리로 무서울 정도로 음악을 크게 틀고 허공을 쳐다본다.  구걸하는 자가 들어온다.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린다. 나의 얼굴에는 짜증이 번진다.  모르긴 몰라도 송장 같은 얼굴, 입속에선 악취가 풍겨져 나올 것이다.
   한번은 친구들과 구걸하는 자를 돕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교길에 벌어졌던, 어느날 밤 하교길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의 시작을 열었다. 중년나이의 남성이 공손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 내가 있던 열차에서 다음 열차로 넘어갔다. 얼마 후 남성이 돌아왔다. 공손한 태도로 구걸하던 그 남성은, 다시 돌아오더니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향해 삿대질했고 사람들은 그를 피했다. 어떤 사람들은 킬킬거리며 그 남자를 비웃었다.  내 옆의 남자는 나쁜 거 보지 말라고 속삭이며 여자친구의 두눈을 가려주었다. 이상한 동물, 야수를 관찰하듯 휴대폰 동영상을 들이댔다. 
 
  나는 솔직히 말해, 남성의 공격적인 울부짖음 보다 사람들의 반응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구걸하는 자들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이야기를 듣자, 친구들은 남자를 공격했다. 대부분이 구걸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열심히 살지 않으려는 자에게 돈을 노동의 대가없이 건네준다는 사실을 옳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홀로 자립할 수 있는 의지는 더 사라진다고 했다. 
  알고 있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그 남자의 울부짖음을 보기 전까지 내가 했던 생각들이었다. 솔직히  친구들보다 더 심했다. 친구들은 장애인, 노인과 같은 사람들의 구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도와줘야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행복감을 가져다 주지 않는 구걸행동에 대해서, 구걸자의 상황과 무관하게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구걸자는 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의 평온을 깨트리니, 그들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들만 도와주는, 이기적인 기집애였다. 군고구마 파는 할머니의 주름과 웃음이 예쁘다고 생각할 때 군고구마를 사왔고, 지하철의 따스한 음악소리를 주는 맹인의 바구니에만 돈을 넣었다. 즉 나는 구걸하는 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구걸 방식을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남자의 울부짖음은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했다. 못사는 사람을 도우려는 그 행동에도 경제적인, 시장원리, 혹은 내가 생각했듯 타인을 대하는 예의, 아름다운 구걸방식인가 아닌가 라는 판단에 따라 행동해야 할까?  그것은 자본주의와  지나친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에 지나치게 물들어버린 사고 때문이 아닐까?
   노력없이 이득을 얻으려 하다니, 노동의 대가없이 사람에게 돈을 지불할 순 없다. 마치, 과도한 사회주의 비판하는 자들의 대사같다.(정확히 지식이 부족해 지나치게 비약이 심하다) 정치적 관념, 마치 복지를 반대하는 정치가들의 의견의 일면이 드러나 있는 대사다. 낮은 자를 도와주는 일을 꼭 그렇게 정치, 경제적 시야로 바라봐야 할까?  단순히, 안 좋은 자들에게 나의 몸을 낮추는 자비심, 동정, 그래, 감수성으로 바라보면 되는 일인데.
   행복을 주는 구걸방식에만 동요하는 나도 문제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누군가를 돕는 일에 꼭 드러나야 되는가? 낮은 자를 바라보는 자비심과 감성이, 그 낮은 자의 아름다움을 판단하여 발휘되는 것이던가?  철없이 자란 공주마마의 예쁘지 않은 것들은 다 싫어, 같이 어리석은 생각이다.
  (글이 점점 먼 곳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아메리카노를 들고 낙엽이 한 두장씩 떨어지는 학교 캠퍼스를 걷는 것(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 가격, 1700원을 구걸하는 자에게 건네준다고?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늦은 밤, 술자리, 세상을 한탄하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비운한 듯 보이는 것. 사랑에 빠졌다 애인과 헤어진 것을 인생이 끝난 듯 바라보는 그 순간, 같은 것의 우리들의 감수성은 파르륵 떨린다. 
   삶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야 할 땐, 애인에게 이별 통보받는 그 순간 뿐만이 아니다.  지하철의 수많은 거지들을 보고 단 한번도 불쌍하다는 감정 대신 더럽다, 짜증난다 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다. 
  앞의 언급한 그 남자의 울부짖음을 킥킥대며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었던 사람들의 삶이야 말로, 사랑과 자비심이 없는, 끝장난 인생이다. 불쌍한 사람에게 사랑주려는 마음 없는 자의 입김은 악취가 풍기고, 얼굴은 송장의 얼굴이다. 이와 같은 감성을 충족시키는 데 돈을 쓰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으면서, 나보다 낮은 자를순수하게 도와주려는 그 돈의 가치를 올바른 복지와 아름다움을 언급하며 비판할 자격이 나에게 과연 있던가?
  마지막으로 톨스토이의 글을 부분 부분 옮겨 적는다.

  좀 전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는 나의 곁으로 다가와 옷을 입혀주고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생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얼굴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2011년 11월 21일 월요일

서정주, 풀리는 한강가에서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니풀 같은 것들
또 한 번 고개 숙여 보러 함인가
 
황토 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 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서정주, 풀리는 한강가에서
 
   초등학교 때, 수인이라는 고니 같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그 또래 아이들보다 빨리 성장한 여자애였다.  그에 비해 난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아 아홉살 어린애들 사이에서도 작았다.  수인이는 엄마와 아빠, 오빠 모두 클래식음악을 하는 애였다. 학교 근처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나는 기회가 되어 그 친구와 함께 발표회에서 피아노 연탄 곡을 연주했고,
 그 연습을 위해 종종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엄마는 수인이를 고니 같다, 라고 표현했다. 수인이가 예뻤거나 마르고 우아한 체형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집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발랄하게 수다 떠는 여자애들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남자애들은 수인이를 무서워했다. 나는 어린 맘에 남자애들은 저속해 진짜 보석을 못알아본다 생각했다.
 
  수인이는 포니테일로 새까만 머리를 묶고 앞머리를 전부 내놓고 다녔다. 어린 내 생각에도 이마가 예뻤다. 수인이의 자세는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어린애답지 않은 그윽한 눈매로 상대방을 쳐다볼 때가 종종 있었다. 어른들에게 공손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지만 학교 친구들과 늘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분명해졌다. 또래 여자 친구들과 팔짱끼고 조곤조곤 수다를 떨며 학교 복도를 걸어 다녔던 나와 다르게 수인이는 혼자 다녔다. 도도함은 자신의 오만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단 조금 슬픈 기분에서 나온 것 처럼 보였다.

  물론, 아직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던 수인이가 한, 혹은 서러움과 같은 감정을 알았던가는 알수 없다. 비롯된 도도함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것은 어쩜 쓸데없이 달콤한 상상에 빠지기 좋아했던 철없는 어린애인 내가 음악 하는 친구, 에 대한 동경, 그리고 엄마가 저 애는 고니같애, 라고 얘기했던 표현이 합쳐져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인이의 까무잡잡한, 이지적인 이마를 바라보던 어린 나의 환상은 아래 문장을 읽자마자 연상되었다.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장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기억난다. 중학교 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이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되는 동물, 혹은 닮고 싶은 동물을 적어 써내라고 하셨다. 익명으로 우리는 쪽지에, 나를 비추는 동물을 적어냈다.  그때 한창, 소설 <아름다운 비행>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기러기, 라고 적어냈다. 
실은 난 기러기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늘 위로 브이자 형태로 날아가는 저것이 기러기인지 아닌지조차 잘 몰랐다.
 
  하지만 기러기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서글픔, 한 같은 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안의 고독에서 퍼져나오는 슬픔을 닮으려고,  안 그래도 쳐진 눈썹을 자주 더 쳐지게 하며 에메하게 웃는 버릇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내숭 백단의 발랄하고 새침한 여자애였다.
   시인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던 것들이 풀린다. 도도한 고독, 슬픔에 젖어 혼자 거리를 두고 멀리 살아가려 했더니, 얼어붙었던 강물을 풀리게 하는 것들이 있다. 나를 사랑했던 것들로부터 멀어져 고독을 슬퍼하는 기분에 심취해살아가는 것이 한평생 울고가려는 서리묻은 섣달의 기러기다. 그런데 그가 사랑했던, 그래서 그를 사랑했던 것들이 그를 기러기가 되어 날아가게 하지 않네. 때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야기 뭉텅이를 들고 시인을 찾아온다. 서러운 이야기, 기쁜 이야기, 가슴 설레는 이야기, 시인은 이야기를 듣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한평생 살아가야지 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햇빛속의 풍경을 본다. 황토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사랑하는 사람을 잊은 슬픔이 느껴지는 풍경들이다. 햇살을 통해 환하게 비춰지는 시인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 누군가를 추억하는 상황. 아..나는 이제야 알겠다. 
  나는 상상한다. 시인과 사람들은 공통된 누군가를 잃었다. 슬퍼서 시인은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한평생 서리묻은 기러기가 되어 울다 다른 곳으로 날아가 도피하려 한다. 꽁꽁 얼어붙게 하여 멀리 떨어지는 것이 덜 아플 듯 싶어서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연약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마지못해 사람들을 맞이한다. 시인을 찾아온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지만  시인의 방문을 열어, 시인의 차갑게 얼어붙은 얼음장을 깨고 햇살을 가져다 준다. 
 
  강물은 녹는다. 사람들과 함께 따스한 햇살 속에서 다시한번 사랑했던 사람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황토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기러기같이 내 한평생을 울다 가려 했더니, 시인은 나지막히 읊조린다

2011년 11월 7일 월요일

오른손잡이의 왼손.





현실의 바다에서 낚아올리는 피둥피둥 살아있는 고기,
현실의 준엄성과 존재의 확실성,
그 왼편에 있는 숙연한 존재, 


(박목월, 왼손 중.)



나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떠올렸다
시인의 말을 통해
때론 아름다움과 낭만을,
때론 경외심을 갖게 하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
어부를 떠올렸다.

 노인은 고집스럽다.
신념을 가지고 있고, 바다의 아름다움을 찬미함과 동시에
 바다의 잔혹함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노인은 바다에서 시인의 왼손이 하는 현실이 주는 고통을 견뎌내야 하고
또 동시에 시인의 오른손이 하는 일, 바다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보상받는다
그것은 노인이 힘든 일을 견디고 돌아와 꾸는 꿈이기도 하다.

시인에 따르면, 그는 왼손의 고통에 기반하여 오른손으로 글을 쓴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시인이 내민 오른손,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시인이다
창조의 세계에서 연필을 잡고
무지개 빛의 상상의 그물 속에서
 황금색 고기를 잡는다


그러나
시인의 왼손이 하는 일은
 낭만, 무지개 빛의 상상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왼손의 작업들은
 현실의 바다에서 피둥피둥 살 오른 고기들을
 물집 잡힌 두 손으로 거둬드리느라 힘들다

그는 꿈을 꾼다
노인에게 오른손이 하는 역할, 즉 시인이 사람들에게 환상, 낭만을 전달해주는 것은 고기에 대한 꿈이다
노인은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서 홀로 투쟁하는 동안 아주 조금씩 잠을 청했다.
때론 황혼녘의 해안에 서 있는 사자 꿈을 꾸었고,
교미기에 들어선 돌고래의 꿈을 꾸었다.
고기를 배에 매달고 돌아와 푹신한 침대에서 사자 꿈을 꾸었다.

왼손의 고통, 투박함이 내재된 아름다움과 비교해보면,
현실감이 없는 사람들의 화사하기만 한 영상들은 가짜다.
현실 속의 고통이 묻어 나오는 아름다움이야 말로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비록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그렇다
노인이 잡아온 고기, 많은 부분의 살점조차 사라져
커다란 꼬리를 단 거대하고 기다란 뼈에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노인의 하룻밤 사투의 결과를 본 한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상어가 저토록 아름답고 멋지게 생긴 꼬리를 달고 있는 줄은 몰랐네.

그리고 동시에 시인과 노인에겐
 왼손의 고통만이 아니라 오른손의 달콤함도 필요하다.
순간, 진실이 아닌 것이더라도 좋다
아픈 고통의 기억에 대한 아주 조금의 보상이다.
위로 받는다.


시인은 아름다운 그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고,
노인은 긴 해안선에 볕을 쪼이는 사자꿈을 꾼다






창조의 세계 옆에
숙연한 나의 왼손
그것은 결코 연필을 잡는 법이 없다

연필의 연한 감촉과                                  
마찰에서 빚어지는 언어言語의                
그물코를 뜨지 않는다                                
하물며 상상의 그물에 걸려든                        
황금의 고기를 잡지 않는다. 
그것과는 상조적 극에서  
나의 왼손은 
존재存在의 숙연한 진실을 증명한다 
다섯손가락은
하나하나 엄연한 사실의 
진실을 웅변하는    
입술을 다물고        
상상의 그물 사이로 열리는            
새로운 여명을 응시한다.               
다만 그것은
현실의 바다에서 낚아올리는 
피둥피둥 살아있는 고기를               
황급하게 잡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시를 빚는 창조의 세계 옆에서 
현실의 준엄성과                           
존재의 확실성을 증명한다 
그 왼손에 서렸던
거창한 침묵과 정적                    
사람들은 누구나 사람들은 누구나
오른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는           
그 왼편에 있는 그 왼편에 있는 
숙연한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박목월, 왼손.